몸이 파르르 떨릴 정도로 차가워진 바람이 점점 깊어지는 겨울을 알렸다. 차갑게 식은 공기와 얼음처럼 싸늘한 기계들이 가득한 마을의 굴뚝에서는 추위를 물리치기 위해 모락모락 연기를 피워내고 있었다. 매서운 칼바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기계들이 째깍거리는 거리를 가로지르는 한 남자가 있었다.
평균적인 남성의 키보다 조금 작고 마른 체구에 이제 막 어른이 된 것 같은 앳된 얼굴. 소년이라 할지, 청년이라 할지 모호한 경계에 서 있는 것 같은 모습을 가진 남자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그저 자신의 목적지를 향해 기계적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내 걸음이 멈추고 경찰서 옆 하수도에 도착한 그는 주변을 살피고는 이내 신속한 동작으로 숨겨져 있던 비밀통로로 들어갔다.
“제논! 어서 와! 오랜만이다!”
“아, 제논. 돌아온 거야? 추울 텐데 이리와.”
“아, 수고했어.”
“오셨습...! 어서...!”
그가 들어서자 조금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던 여러 사람이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인사를 건네었다. 주황색 머리를 하나로 묶은 체 활기찬 미소를 지어주는 와일드 헌터 교관 벨, 험상궂은 인상을 하고 있지만 추웠을 그를 난방장치 앞으로 부르는 일렉스. 다른 레지스탕스의 요원을 가르치는 와중에도 그에게 손을 흔들어주는 헨리테와 요란한 기계 소리에 묻혀서 제대로 인사가 전해지지 않는 체키.
“어서 와요, 제논. 이번에도 수고가 많았어요.”
그리고 다른 이들의 보고서를 처리하는 와중에도 고개를 들고 그와 눈을 마주하며 인사를 건네는 지그문트. 밖에서는 단정히 묶고 있던 머리를 풀고, 안대 사이로 푸른 눈을 살짝 휘어내며 인사를 건네는 그녀에게 고요한 푸른 눈으로 마주해주는 청년.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던 청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녀왔습니다.”
그의 인사와 함께 온기를 품고 있던 숨결이 하얀 입김을 만들어내었다. 지하광장 안에서 하얗게 피어오르는 연기는 그의 고요한 인사와 함께 흩어져버렸다. 그에게 인사를 건넸던 사람들은 그의 작지만 또렷한 인사에 모두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맞이해주었다.
“이번 임무 보고서입니다.”
인사를 건넨 뒤 곧바로 지그문트에게 다가가 보고서를 내미는 제논. 그의 보고서를 받아드는 지그문트의 책상 위에는 상당한 양의 서류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오르카를 붙잡고 블랙윙의 실질적인 수장인 겔리메르의 음모까지 저지한 그들. 블랙헤븐을 추락시킨 뒤에 점점 블랙윙의 추세도 약화하고 있었다. 하지만 옛 영광을 잃고 싶지 않았던 그들의 발악은 생각보다 거세었다. 에델슈타인을 점거하고 있으면 어떻게든 검은 마법사가 자신들을 도와주리라고 굳게 믿고 있는 어리석은 자들의 반항으로 인해 레지스탕스는 연말임에도 불구하고 한창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제논이 저희 동료가 된 것도 이맘때네요.”
보고서를 받아든 지그문트가 말을 꺼내자 보고서를 건넨 제논이 그게 무슨 문제 있느냐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말에 의미를 잘 모르는 듯한 그의 반응에 지그문트는 웃으며 제논이 건네준 보고서를 받아 책상 위에 올려놓고는 그에게 잠깐 쉬라는 듯이 의자를 가리키면서 말을 이어갔다.
“실험실을 나와 이곳에 온 지 3년이 다 되었네요. 음... 기분이 어때요?”
그녀가 손가락으로 햇수를 짚어보더니 말했다. 벌써 3년이냐며 놀라는 벨과 시간 참 빨리 간다라며 헨리테와는 달리 제논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맑고 파란 호수 같은 눈동자 속에 그녀의 얼굴을 담아낼 뿐이었다.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지그문트.”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수년 동안 오로지 전투만을 위해 살아왔던 그에게 감정을 깨닫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던 것 같았다. 조그마한 흔들림도 없는 고요한 그의 수면에 비친 그녀가 조금 쓴 미소를 지으며 눈동자를 내렸다.
“아, 그래요? 하긴... 이곳에 와서 바쁘게 임무만 했으니까요... 이제 겨우 해방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바쁜 건 여전하네요...”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씁쓸함이 진하게 묻어났다. 자신의 기억을 찾기 위해 실험실에서 탈출했던 그때에서 벌써 3년. 만들어진 전투 병기로서의 삶에서 벗어나 자신의 자유를 얻게 된 제논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그녀를 도와주는 것이었다. 레지스탕스로서 배신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주던 무덤덤한 표정이 아직도 또렷이 기억났다.
겔리메르의 추격을 피해 도망칠 때에도 그는 자신의 문제가 모두를 위험하게 만들 것을 걱정하여 떠난다고 하였다. 스스로는 자유로워졌음에도 그들의 문제를 도와주기 위해 억압된 마을의 혁명군으로 들어온 그는 어쩌면 아무런 상관도 없을지 모르는 고향의 자유를 위해 열심히 싸워주었다.
이제 거의 끝나가고 있지만, 여전히 끈질기게 남아있는 잔당들이 언제 소탕될지 모르는 일. 어쩌면 이대로 대립한 채 굳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작은 불안감이 그녀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언젠가 다시 평화로워진 에델슈타인을 보며 그의 기억을 찾아주겠다고 스스로 약속했던 다짐이 아슬아슬하게 이뤄지지 않자 그녀는 왠지 모를 초조함을 느꼈다.
만약, 어릴 적 그때처럼 평화로웠던 고향의 모습을 그가 보게 된다면...어쩌면 그가 원했던 기억을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기대감 때문에 더욱 초조해지는 그녀. 생각해보면 제논은 자신의 기억을 찾기 위해 나온 것이었기에 에델슈타인의 자유보다는 제 일을 더욱 우선시한다 해도 말릴 명분이 없었다. 그가 이전에 에델슈타인의 주민이었다곤 해도, 레지스탕스의 일은 그것과는 별개의 일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다른 레지스탕스의 요원... 아니, 에델슈타인의 시티즌들처럼 자신의 온 힘을 다해 에델슈타인의 자유를 위해 싸워주는 그에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다는 것이 죄책감이 되어 그녀의 표정에 옅게 드러났다.
이런저런 생각이 뒤섞인 어두운 표정으로 제논을 바라보고 있는 지그문트를 아무 말 없이 바라보고 있던 교관들은 잠시 자신들의 일을 살짝 내려놓았다. 그 사이에 제논은 임무가 없으면 가볼 곳이 있다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런 제논에게 지그문트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이 입을 달싹거렸다. 하지만 차마 마음속에 담긴 무거운 말들을 내뱉지 못하고 그저 살짝 손을 흔들어주며 잘 가라는 인사만 전할 뿐이었다.
“자, 제논도 갔으니 이제 우리끼리 진-한 대화를 해볼까? 대장?”
제논이 비밀광장을 나서자마자 곧바로 지그문트의 옆으로 모여드는 친구들. 지그문트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자 그들은 이미 안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 예쁜 대장에게 그런 어두운 표정은 안 어울린다고?”
“일단 헨리테 입부터 막고 시작하자.”
벨이 석궁을 집어 드는 것을 말린 체키와 너는 그냥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조언하는 일렉스 사이에서 지그문트는 아직 분위기를 읽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일 있는 거에요?”
“일은 지그문트, 너한테 있지. 아까부터 제논을 암울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잖아. 당장에라도 울 것 같았다고?”
일렉스의 직구에 지그문트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면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제논은 기억을 찾는다는 목적도 뒤로 한 체 저희랑 같이 싸우고 있는데 저희는 해준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긴, 그렇기도 하군요. 제논이 연구실을 나온 목적은 기억 때문이었으니까...”
체키가 그녀의 말을 수긍하면서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지하게 고민에 빠진 체키의 뒤통수를 힘차게 후려친 벨이 당당하게 가슴을 편 체 소리쳤다.
“에델슈타인이 평화로워지면 제논의 기억도 돌아올 거야!”
“그건 도대체 무슨 근거로 말하는 거야?”
못 말리겠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벨의 말에 작게 투덜거리는 일렉스. 그런 그들을 보면서 기운을 찾은 것인지 작게 웃던 지그문트가 조금 쓴 미소와 함께 고민에 빠졌다.
“그에게 하다못해 무언가 해주고 싶기라도 한데... 지금은 바쁘다는 이유로 기억을 찾아주는 것도 미뤄지고 있으니...”
“그렇다면... 생일 파티라도 해주는 건 어때?”
헨리테의 제안에 모두의 눈이 조금 커진 체 그에게 고정되었다. 헨리테가 어때? 라는 표정을 짓자 지그문트가 고개를 작게 저었다. 예전에 그녀가 제논의 선물에 보답하는 겸으로 그의 생일 선물을 주기 위해 생일을 물었었지만 그의 입에서는 “불필요한 자료는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라는 대답뿐이었다. 나중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루티에게도 물었지만 루티도 역시 생일 같은 것은 전투 병기에게 필요 없는 자료니까 겔리메르가 남겨두었을 리 없다고 말했다.
이미 그의 예전 집은 폐허가 된 지 오래. 그의 부모님 또한 없어진 그를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결국 블랙윙 기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고, 당연하게도 그 뒤로 소식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너무 어릴 적의 일이고 그때의 자신들은 설마 그를 수십 년이 지난 후에나 보게 될 줄 몰랐기에 그의 생일을 기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의 생일을 찾을 방법이 없어요... 모르는 생일을 어떻게 챙긴다는 거죠?”
“그러니까, 이날로 하면 되지 않겠어?”
헨리테가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당당한 미소와 함께 달력을 집어 들어 날짜를 넘겼다. 어느 한 날짜를 짚어서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자 그들은 잠시 그 날짜를 바라보다가 이내 그 날의 의미를 깨닫고는 탄사를 내뱉었다.
“제논이 진정한 자신을 찾기 위해 자유로워진 날이니 새로 태어난 날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어?”
“오, 헨리테! 생각보다 머리가 좋은데!”
“아니, 벨. 이런 것도 생각 못하면 마법사로서 체면이 아니라고...”
헨리테가 투덜거리는 것은 가볍게 무시한 벨이 신난 목소리로 기지 내에 있던 다른 레지스탕스 요원들을 불러 모았다. 재규어들의 안장을 손질하고 있던 와일드 헌터 요원과 메카닉의 성능 향상을 위해 부품을 조립하고 있던 에이든과 지팡이를 닦고 있던 루카. 그리고 막 임무에서 귀환하고 돌아온 데몬까지 그녀의 부름에 모여들었다.
“무슨 일입니까?”
“모두 제논의 생일파티를 위해 협조하도록!”
그들의 의사 따윈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반강제적으로 제논의 생일파티 임무(?)에 참여하게 되어버린 다른 이들은 벨의 성격을 잘 알기에 작게 웃으면서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동료의 생일 파티에 당연히 도와야 한다면서 잔뜩 신바람이 난 벨의 명령을 따르겠다고 말했다.
“좋아! 그러면 너희는 이곳을 파티 장으로 꾸며주고, 데몬은 제논의 시선을 분산시키도록!”
“아, 깜짝 파티인 겁니까?”
“당연하지! 다들 빨리 움직이라고!”
벨의 의기양양하게 외치며 모두에게 신속하게 명령을 내리자 그들을 알겠다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지금부터 준비를 해야겠다면서 창고에 쓸 만한 재료를 찾으러 갔다. 데몬도 돕겠다며 같이 창고로 향하면서 어떻게 기지를 꾸밀지에 대한 의견으로 도란거렸다.
“그리고 우리는 선물을 맡는다! 준만큼 되돌려줘야지!”
순식간에 파티 계획이 세워지고 선물을 담당하게 된 교관들. 이전에 제논이 에델슈타인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을 때, 서툴게 배운 사람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의 조언을 받으면서 그들에게 주었던 선물. 비록 본인들에게 제대로 활용되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준 것으로도 제논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아 꽤나 기뻤었다. 이제는 그의 기억의 진위와는 상관없이 둘도 없는 소중한 동료이자 친구가 된 제논에게 마음에 드는 선물을 해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지그문트는 기분 좋은 고민에 빠졌다.
“선물 말입니까? 후후... 안됐지만 저는 제논이 완벽하게 만족할 수 있는 선물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 부품부터 모아야겠군요!”
그녀의 옆에 있던 체키는 선물이라는 말에 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당당하게 소리치며 엄청난 기세로 의욕을 불태웠다. 곰돌이의 모습으로 불타오르던 체키는 말을 마치자마자 메카닉을 탑승하고는 순식간에 지하기지를 뛰쳐나가고 말았다.
그런 체키는 아랑곳하지 않고 블랙잭의 옆으로 간 벨은 블랙잭의 우리에 잔뜩 쌓아두었던 물품들을 꺼내며 헨리테에게 흔들어 보였다.
“푹신푹신한 최고급 안장이랑 재규어들을 한방에 사로잡을 수 있는 고급 육포 중에 뭐가 더 좋을까? 아니면 DEX 24%인 이 석궁은 어떨까?”
제논은 석궁을 안 쓰고, 재규어도 타지 않는다는 말을 꺼내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을 알고 있는 헨리테는 열심히 자신의 귀중한 물건들 중에서 뒤적거리는 벨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고개를 돌리게 하고는 귓가에 무언가를 소곤거려 주었다.
“차라리 ... ...는 어때?”
“그거 좋은 생각이다! 좋아, 얼른 구하러 가자고!”
헨리테의 말을 들은 벨의 눈이 커지더니 이내 활짝 웃으면서 헨리테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와일드 헌터다운 강력한 팔 힘으로 헨리테를 끌어당겨 블랙잭 위에 마치 짐짝처럼 태우고는 자신도 가벼운 동작으로 올라타며 지그문트에게 소리쳤다.
“지그문트! 우리 나갔다 올께!”
“무슨 선물을 하려는 건데요?!”
아직 선물을 생각하지 못한 지그문트가 당장 나가려는 그들에게 묻자 벨은 블랙잭의 고삐를 잡아당기며 활기찬 미소와 함께 말했다.
“비밀이야! 미리 알면 재미없잖아!”
“잠깐, 벨! 지금 나간다고 해도... 으아악!”
헨리테가 무언가 말하며 몸을 일으켰지만 흥분해 있는 벨에겐 들리지 않았던 것인지 아랑곳하지 않고 고삐를 잡아당겼다. 그 덕분에 불안정한 자세로 몸을 일으키고 있던 헨리테는 몸이 쏠리는 것을 느끼며 비명과 함께 다급히 안장을 붙잡아야 했다. 비명과 함께 기지를 뛰쳐나가는 벨과 헨리테를 보면서 정말 벨은 아이들보다 못 말리겠다며 한숨을 내쉬는 일렉스였다.
“음... 아, 좋은 생각이 났다! 이런, 지금부터 해도 시간이 빠듯하겠는걸?”
“안 알려줄 거죠?”
일렉스가 중얼거리며 방을 나가려고 일어서자 지그문트가 그를 살짝 떠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에 일렉스는 잠시 망설이는 듯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이내 “역시 다들 비밀주의인데 나만 알려주는 건 좀 그렇지?”라면서 히죽 웃어주고는 방을 나갔다. 일렉스에게 잘 가라며 손을 흔들어주고 방에 홀로 남은 지그문트는 방 안을 서성거리며 무엇을 선물할지 계속 고민에 빠졌다.
한참 동안 고민에 빠져서 방 안을 이리저리 빙글빙글 돌아다니던 지그문트는 일단 일부터 처리하면서 고민해보자고 생각하면서 다시 자리에 앉으려 하였다. 그런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책상 위에 놓인 작은 물건이었다. 서류와 펜, 차트와 이런저런 것들이 놓여 있던 책상 위에서 무언가 발견한 지그문트는 자신의 선물을 받고 기뻐할 제논을 생각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요즘 들어 계속되는 업무에 치여 살던 와중 생긴 즐거운 이벤트에 그녀는 정말로 기쁜 듯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방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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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델슈타인 인근 외곽 북부에 위치한 기계무덤. 폐기되어버린 수많은 기계의 녹슨 부품을 나뒹굴고 있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풍기는 이름 그대로 기계의 무덤. 하늘을 닿을 듯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 기계부품의 산들의 사이를 지나가고 있는 두 사람의 인영이 있었다.
“그런 중요한 걸 이제 말하면 어떡해! 하마터면 파티 때 시든 꽃다발을 줄 뻔했잖아!”
“말하려는데 네가 그냥 나갔잖아. 암튼 성질 급한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물론, 그런 정열적인 모습도 매력적...커흑!”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꺼내던 헨리테의 명치를 때린 벨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면서 부들거리는 그를 지나쳐 앞장섰다. 너무 마음이 앞선 바람에 아직 선물을 준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무작정 달려온 벨 덕분에 지금 두 사람은 다시 빈손으로 본부로 귀환하는 중이었다.
“제논이 나한테 줬던 달리아 꽃다발보다 더 화려하고 예쁜 꽃을 선물할 거야!”
“달리아의 꽃말은 정열과 감사지. 정말 너한테 선물하기 딱 어울리는 꽃인걸?”
다시 느끼한 말을 쏟아내는 헨리테의 목소리에 벨은 이번에는 아예 비명도 못 지를 정도로 아주 세게 명치를 때리겠다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뒤따라오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헨리테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벨은 당황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순간 갑자기 텔레포트로 벨의 눈앞에 나타난 헨리테가 어디서 꺾어온 것인지 모를 노란 민들레 하나를 놀라서 굳어버린 벨의 귓가에 꽂아주었다.
“난 언제나 정열적인 그대가 내 곁에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있으니까.”
“이 꽃처럼 꺾어버리기 전에 닥쳐.”
벨의 와일드한 기세에 눌려버린 헨리테는 끄응거리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럼에도 그가 귀에 꽂아준 민들레를 모자에 눌리지 않도록 조심스러운 손길로 매만지는 벨의 모습을 보면서 조용히 미소를 짓는 헨리테였다.
“꽃다발로는 심심하니까 케이크도 선물할까? 달콤하고 폭신폭신한 케이크!”
“케이크는 직접 만드는 것보단 사는 것이 제논에게 훨씬 좋을 것으로 생각해.”
상상만으로도 군침을 흘리는 벨과 벨의 요리솜씨를 알고 있기에 진심을 담은 조언을 하는 헨리테. 제논의 생일파티에 기대감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는 벨과 그런 벨의 대화를 받아주는 헨리테. 두 사람이 지나가는 기계더미 뒤쪽에 누군가의 인영이 조용히 서서 자신의 발밑에 흔들리는 꺾인 민들레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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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자신을 제외한 레지스탕스들이 다시 예전만큼이나 바쁘고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 제논의 눈에 들어왔다. 혹시 블랙윙의 남은 세력과의 싸움에서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지그문트에게 물어봤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만을 하고는 다른 일이 있다면서 가버릴 뿐이었다. 다른 이들에게도 물어보았지만 대부분 자신의 시선을 피한 채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며 이런저런 핑계로 도망치는 모습뿐이었다.
‘다른 일이란 건... 내가 알아선 안 되는 건가...?’
오늘의 임무를 전달받기 위해 지하기지로 걸어가는 내내 제논은 끝없이 메모리를 가동하여 그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이유를 생각해보고 있었다. 자신을 제외한 다른 이들이 바삐 움직이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가슴 부근이 구멍이 난 것처럼 싸늘한 기분이어서 자신의 심장 부근을 더듬어보곤 했었다. 물론 진짜로 구멍이 났던 적은 없었지만.
기지로 걸어가는 내내 고개를 숙인 체 자신의 발 앞을 바라보면서 걸어가고 있는 제논은 지금까지 관찰한 결과를 토대로 계속해서 그것을 유추해보려 하였다. 자신에게 무언가 숨기는 것 같은 그들의 태도. 모든 동료가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은 분위기에 제논은 이제 거의 끝나가는 블랙윙과의 전투를 연관시키며 하나의 가설을 세워보았다.
‘필요...없어진 건가...’
무기는 전쟁이 있을 때에만 필요한 것이다. 전쟁이 없다면 무기를 굳이 들 필요는 없었다. 전투를 위해 태어난 전투 병기도 그와 마찬가지. 전투가 없다면 쓸모없는 고철 덩어리 취급을 당하며 그들에게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던 제논의 머리 부근에 둔탁한 소리와 함께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
고개를 숙인 체 고민에 빠져 있었던 제논은 눈앞에 있던 가로등을 보지 못하고 부딪히고 만 것이었다. 얼얼한 머리를 매만지면서 평소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실수에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무언가 가슴이 실에 엉킨 것처럼 답답하게 조여 오는 것 같은 느낌에 제논은 나중에 루티에게 이 느낌에 대해 상담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지하기지로 들어갔다.
“아, 제논. 오셨습니까? 그럼 어서 가죠.”
지하기지로 들어서자 아무도 없는 광장에 홀로 있던 데몬이 그를 반겨주었다. 제논이 광장을 둘러보면서 다른 이들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려던 순간 데몬이 그의 팔을 덥석 붙잡고는 지하기지 밖으로 끌고 나갔다. 제논을 데리고 한참을 데리고 다니던 데몬은 레벤광산 인근까지 와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어디로 가는 거죠?”
“아, 음... 헤네시스 인근에 버섯 몬스터가 많이 생겼다고 해서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습니다.”
“...? 그런 임무에 데몬과 저까지 투입될 이유가 있나요?”
레지스탕스 내에 최고 에이스라고 불리는 데몬과 제논이 겨우 레벨 20 정도 밖에 안 되는 버섯을 잡는 임무를 한다는 것이 매우 비효율적이라 생각하며 의문을 제기하자 데몬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런 사정이 있어서 그런 것 아닐까요?”라고 모호하게 말할 뿐이었다. 아무튼 목적지가 헤네시스이니 이곳에서 시간 낭비할 이유는 없다고 판단한 제논이 신속한 이동을 위해 프로멧사를 소환하며 말했다.
“그런 임무라면 저 혼자 해도 상관없습니다. 데몬은 다시 기지로 복귀하시죠.”
“아뇨!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혼자는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혼자 가려던 제논의 옆 좌석에 올라탄 데몬을 바라보던 제논은 오늘 그의 행동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논리에 맞지 않는 언행과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모습 등 수상한 점투성이의 데몬을 잠시 바라보던 제논은 일단 임무처리를 위해 프로멧사를 가동하고 목적지인 헤네시스로 이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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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네시스는 오랜만이군요. 몇 번 들러본 적은 있지만... 제논도 어쩐지 그리운 느낌이지 않습니까?”
평온한 헤네시스 마을에 도착하여 거리를 느긋한 걸음으로 걸어가며 제논에게 말을 건네는 데몬. 그에 제논은 에델슈타인을 떠나 처음으로 들렀던 마을인 헤네시스에서 짧았지만 겪었었던 이런저런 기억들을 잠시 떠올렸다. 잠시 아무 말 없이 헤네시스를 바라보고 있는 제논의 모습에 그도 역시 추억을 회상하고 있다고 생각한 데몬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임무 끝내고 이따가 그때 신세 졌던 사람들에게 가서 인사라도 하는 건 어떻습니까?”
“저희는 임무를 하러 왔습니다만...”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에게 잠깐 짬을 내서 인사하러 가는 것도 사회생활에 중요한 임무입니다.”
데몬의 말에 제논은 헤네시스의 장로 스탄과 밍밍 부인이 사는 버섯 집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언제나 제논의 우선순위는 임무였기 때문에 인사보다는 임무를 처리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말을 하며 몸을 돌려 마을 밖 사냥터로 나갈 뿐이었다. 버섯 몬스터들이 많이 있는 곳을 찾아 돌아다니는 제논과 그의 옆에서 쫓아다니는 데몬은 자신도 임무의 정확한 위치는 잘 모르겠다면서 자꾸만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헤네시스 시장에 이것저것 팔던데 임무 끝나면 좋은 무기 같은 것을 파는지 보러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아뇨, 지금 제 소드로도 충분합니다.”
“그렇습니까... 그런데 에너지 소드는 사용하기 불편하지 않으십니까? 이리저리 휘어지고 늘어나니까 사용하기 까다로울 것 같은데...”
“사용법만 익히면 간단합니다.”
평소와 달리 오늘따라 말이 많아진 데몬에게 짧게 대꾸를 하며 헤네시스 인근 숲을 돌아다니는 제논. 하지만 숲 속에는 몇몇 작은 버섯 무리만이 있을 뿐 들었던 것과 달리 마을에 피해를 줄 정도로 많은 숫자의 버섯은 존재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몬스터의 개체 수가 증식해있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근처 모험가들이 레벨 업을 위해 전부 사냥한 모양입니다. 프로멧사의 재충전까지 시간이 남았으니 마을에서 기다리시지 않겠습니까?”
데몬의 말대로 프로멧사의 재충전이 완료될 때까지는 사용할 수 없는 상황. 그러나 텅 비어있는 지하기지가 신경 쓰여, 되도록 빨리 복구하고 싶은 제논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그냥 디멘션 게이트를 이용해서 돌아가죠. 이곳에 볼일이 있다면 데몬은 나중에 오세요.”
부스터를 펼쳐 에비에이션 리버티를 시전하려는 제논을 다급히 붙잡은 데몬은 제논을 끌어내리며 다시 날아가지 못하도록 그의 팔을 꼭 붙잡았다.
“아무리 그래도 인사도 없이 가는 건 조금...”
“왜 그렇게 시간을 끌고 계신 거죠?”
더는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던 제논은 데몬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제논의 직구에 흠칫 놀란 데몬은 들켰다는 것에 당황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이렇게까지 했음에도 쉬이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데몬의 모습에 제논은 평소와 똑같은 톤으로, 하지만 얼굴은 약간의 인상을 쓴 채로 말했다.
“왜 모두 저한테 뭘 숨기시는 거죠? 제가 믿을 수 없는 동료라서 그런 건가요?”
지금까지 그 어떤 일에서 흔들림이 없었던 푸른 눈동자가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무 감정도 비치지 않았던 얼굴은 미세하지만,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지금껏 본 적 없던 제논의 쓸쓸해 보이는 표정에 데몬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동생을 떠올리고 있었다. 항상 군단장의 업무에 치여서 제대로 돌봐주지 못했던 자신의 동생, 데미안. 시간이 날 때마다 집에 들러보면 병약한 몸 때문에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혼자 집 안에서 놀고 있던 그 아이의 표정이 지금의 제논의 표정과 겹쳐지면서 데몬은 자신도 모르게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데몬?”
대답 대신 그의 머리를 쓰다듬는 커다란 손. 부드러운 손길로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데몬은 아련한 추억에 대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논. 다들 당신을 싫어해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가끔은 그 사람의 기쁜 모습을 보기 위해서 숨기는 것도 있답니다.”
이제는 그 아이가 기뻐하는 미소를 볼 수 없다는 것에 대한 후회가 섞여있는 조언을 건네는 데몬. 그를 지그시 바라보던 제논은 눈을 잠시 감은 채 그의 말을 되짚어보고는 이내 살짝 의구심을 담고 있지만, 이제는 다시 흔들림 없는 푸른 눈을 뜨고 데몬을 바라보았다.
“딱히 걱정하는 건 아니었습니다.”
“아, 그러신가요?”
다시 그 특유의 무덤덤한 표정으로 돌아온 제논의 말에 데몬이 작게 웃으며 그의 머리를 다시 쓰다듬어 주었다. 아직은 불안함이나 외로움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제논이 이런 일로 조금 사람에 가까워진 것 같다는 생각에 데몬은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꼈다.
“동료를 믿어주십시오, 제논. 당신은 생각보다 많이 사랑받고 있으니 말입니다.”
사랑받고 있다는 데몬의 말에 제논은 아무 대답 없이 그저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길을 가만히 받고 있을 뿐이었다. 이내 속셈을 들켜버린 데몬이 제논의 머리를 살짝 누르면서 말했다.
“어차피 들켰으니 적당히 시간 때우다가 가도록 하죠. 어디로 가보시겠습니까?”
“잠깐 볼일이 있어서 베리타스로 갈 생각입니다만, 같이 가실 건가요?”
베리타스로 간다는 제논의 말에 데몬은 자신보다는 루티가 훨씬 더 시간을 잘 끌어 줄 것으로 판단하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차피 자신이 같이 가 봤자 그들만의 시간을 방해한다고 판단한 데몬은 먼저 기지로 귀환하도록 하겠다며 날개를 펴 날아갔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제논 또한 루티가 있는 베리타스로 가기 위해 어느새 충전이 다 된 프로멧사를 소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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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깜짝할 사이에 베리타스로 귀환한 제논이 프로멧사에서 내려 루티가 있는 곳을 향해 통로를 걸어갔다.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본부를 이상하게 여기고 있던 제논은 항상 프로멧사 옆에서 기계를 만지고 있던 에드윈이 없다는 것을 보며 박사님들이 있는 연구실로 들어갔다.
“제논! 어서 와!”
그러나 연구실에 항상 있던 문박사님이나 프로메테, 나타나엘 박사님의 모습은 없고 대신 루티만은 한결같은 모습으로 비행선을 타고 그를 반겨주었다. 귀를 쫑긋거리며 다가오는 루티에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 제논이었다.
“루티, 다른 박사님들은 어디 있어?”
제논의 질문에 루티는 “글쎄?”라며 귀엽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모른 척을 하였다. 제논의 비밀 파티에 대해 이미 모든 계획을 알고 있는 루티는 근처에 떠 있는 홀로그램 시계를 힐끔 바라보고는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한 표정으로 제논에게 질문하였다.
“제논! 제논이 실험실을 나온 것도 이제 3년이 다 되었는데 기분이 어때?”
루티의 질문에 제논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지난 3년간의 데이터. 자신의 기억이 소거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제논은 아무리 찰나의 순간이어도 항상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처음 자신의 선택으로 길을 나선 순간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작은 순간순간을 기억하며 지금 온전한 자신의 시간을 기록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에 대해 생각했던 그때. 그녀를 만나고, 머릿속의 작은 노이즈가 생기며 시작된 작은 균열은 그가 스스로 좁은 새장을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무조건적이고 강압적인 명령이 아닌,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는 자신의 길. 잃어버린 기억을 찾고, 진정한 자신을 찾기 위한 여행.
비록 아직 더는 추가로 떠오르는 기억은 없었다. 그때의 기시감도 확실하게 자신의 기억이라곤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따금 그는 답답함과 초조함을 느낄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도와준 건 지금의 동료들이었다. 자신을 믿고, 만약 자신이 그들이 찾던 친구가 아니라고 해도 이미 자신은 그들의 친구이자 동료라고 말해주던 그들. 그런 그들 덕분에 자신은 더는 초조해 하지 않고 천천히, 느리지만 꾸준하게 자신을 찾는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처음 느낀 바깥의 햇살과 자신에게 다정히 말을 거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온기.
헤네시스에서 처음 맛본 밍밍부인의 도시락과 처음 본 이계의 풍경, 그리고 땅속이 아닌 바닷속의 풍경. 실험실은 갓 나온 그에게 세상은 그 무엇보다 더 찬란하고 밝게 빛났다. 풍경 하나하나, 사람 한명 한명이 모두 눈부시게 빛나는 것 같았다. 에델슈타인의 어린아이들은 물론 헤네시스의 작은 꽃들과 아쿠아리움의 물고기들까지 전부 찬란한 생기를 머금고 빛나고 있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세상을 처음 보듯, 반짝이는 눈으로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감시를 피하는 상황에도 그의 눈에는 아름다운 세상이 한가득 들어왔다. 무채색으로 가득하던 그의 세계에 형형색색의 색채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조금씩 그의 빈 캔버스를 채워가는 색들은 그의 마음을 따스하게 해주는 것 같았다.
그 기억의 사이사이에 그녀가 있었다. 에델슈타인의 공원에서도, 이계의 그란디스에서도, 조용한 마을 마가티아에서도. 빛나고 자유로운 세상에서 그녀는 홀로 사슬에 감긴 채 자신을 찾아왔다. 자신을 스스로 그곳에 묶인 채 겨우 빛을 찾은 자신에게 다시 돌아오라 외치는 그녀가 왜인지 서글퍼 보였던 건 자신의 착각이었던 것일까. 자신보다 더 인간적인 부분이 많았던 그녀라면 진작 떠나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며 끝까지 남아있던 그녀는 과연 어떤 마음이었을까.
루티는 그녀가 감정이 없는 제네로이드라고 말했지만, 마지막 장면에서의 그녀는 분명히 울고 있었다. 자신에게 뒤돈 그녀의 모습에서는 알 수 없는 쓸쓸함과 슬픔이 진하게 느껴졌다. 이미 죽음을 각오한 그녀의 뒷모습에 자신은 더욱 그녀를 말려야 함에도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이 더욱 강하게 만류했더라면 그녀는 지금쯤 같이 있을 수 있었을까. 이미 지나버려 답을 알 수 없는 현실에 그는 작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계 무덤에 도착했을 때, 그는 내심 베릴이 그곳에 있기를 바랐다. 수많은 양산형 제네로이드의 펄스들 사이에서 언제가 날카롭고 곧게 느껴지던 그녀의 펄스를 느끼려 해보았지만, 그곳에는 작고 미약한 펄스들뿐이었다. 똑같이 획일화된 펄스들과 미약하게 흔들리는 펄스들. 그 안엔 자신이 애타게 찾는 펄스는 없었기에 제논은 그저 베릴이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점점 어두워지는 그의 표정에 루티가 작은 발을 들어 그의 뺨을 톡톡 쳤다. 부드러운 작은 발의 느낌에 제논은 살짝 놀라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소중한 친구의 시선을 마주하였다. 괜찮으냐고 묻는 루티의 말에 작게 끄덕임으로 대답해준 제논은 이내 떠올리던 잡념을 털어내었다. 그녀라면 분명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이다. 적어도 기억 속의 그녀는 언제나 강하고 당당한 이미지였다. 근거 없는 추측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자신의 감을 믿어보기로 하였다. 이것도 자신이 점점 사람답게 되어간다는 것일까. 나쁘지 않은 느낌에 그는 자신의 감을 믿고 그녀가 살아있다고 믿기로 하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계속해서 생각에 잠겨 있는 제논을 바라보던 루티는 잠시 시계를 바라보곤 다시 제논의 뺨을 톡톡 건드렸다. 이제는 본부로 귀환할 시간이라는 루티의 말에 시계를 본 제논은 금세 지나가 버린 시간에 신속하게 프로멧사를 불러 동료들이 있는 곳, 에델슈타인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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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온 에델슈타인. 평온해 보이는 사람들과 째깍거리며 열심히 움직이고 있는 기계들. 그리고 겨울 하늘에 모락모락 피어나는 굴뚝의 연기. 제논의 머리 위에서 이마를 동그란 앞발로 꾹 눌러준 루티는 다시 앞발로 경찰서 쪽을 가리키며 어서 기지로 들어가자고 재촉하였다. 루티의 말을 따라 경찰서 옆 숨겨진 통로로 들어가는 제논은 이내 레지스탕스의 비밀 광장에 들어섰다.
“생일 축하해, 제논!”
그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지하기지에 한가득 울리는 목소리들. 그런 그들이 서 있는 지하광장은 평소와 달리 알록달록한 장식들로 화사하게 꾸며져 있었다. 작은 종이 폭죽들이 여러 개 터져 나오고 피리나팔을 부는 요원들 사이에서 커다란 케이크를 든 교관들이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뭐해! 얼른 와서 촛불 꺼야지!”
“어서 와서 끄고 소원 빌어요.”
벨, 헨리테, 일렉스, 체키, 지그문트가 그에게 미소를 지으며 케이크를 들고 있었다. 잠시 그들의 모습을 멀뚱멀뚱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제논은 이마를 톡톡 두드리는 루티의 손길에 정신을 차리고는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갔다. 초가 녹아버린다며 재촉하는 벨의 말에 제논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입김을 불었다. 일렁거리며 타오르던 여린 촛불은 그런 바람에도 견디지 못하고 사르륵 사라져버렸고, 잠시 찾아온 어둠 속에서 제논의 파란 눈동자와 두 뺨에 새겨진 제네로이드 마크가 은은한 네온 빛으로 빛났다.
불 근처에 있던 루카가 전등을 켜고 모두가 제논에게 활짝 웃으며 축하한다는 말을 건네주었다. 항상 임무를 할 때마다 도와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레지스탕스의 일반 요원들과 미소를 지으면서 “제 말이 맞죠?”라며 제논의 머리 위에 있던 루티를 데려가는 데몬. 그리고 그 뒤에 바로 제논의 머리에 고깔모자를 씌우는 벨.
“자! 주인공 모자!”
“오늘은 제 생일이 아닙니다만...”
“하지만 네게는 가장 의미 있는 날이잖아? 자신의 자유를 가지고 새로 태어난 날이라고 생각해.”
일렉스가 조심스럽게 탁자 위에 올려놓은 케이크를 먹기 좋게 자르던 헨리테는 이내 케이크 한 조각을 제논에게 내밀며 말했다. 새하얀 생크림과 과일들로 먹음직스럽게 장식되어있는 케이크 조각을 바라보던 제논은 이내 감사합니다. 라는 말과 함께 조각을 받아들었다.
“자! 생일축하 노래라도 부를까!”
“그건 넘어가 줘. 내가 노래를 부르면 아이들이 엄청나게 싫어했단 말이야.”
“맞습니다. 중요한 건 노래가 아니라 선물이죠. 그리고 제 선물이 최고라고 자부합니다!”
일렉스가 안 좋은 추억을 떠올리며 손을 내저었고, 체키가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말했다. 선물이라는 말에 벨도 맞장구를 치며 체키를 바라보았다가 이내 그의 텅 비어버린 손을 보고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라? 선물은?”
“후후... 서프라이즈를 위해 지금까지 숨겨두고 있었죠.”
체키가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자신의 곰 탈을 살짝 들어 올리자 순간 레지스탕스의 요원들은 그의 얼굴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체키에게 시선을 집중하였다. 그 순간 갑자기 체키의 손이 탈 안으로 들어가더니 내부를 조금 휘적거리다가 무언가를 손에 쥔 체 탈 밖으로 빠져나왔다.
“여기 있습니다!”
“어째서 그런 곳에서 튀어나오는 건데!”
“서프라이즈는 예상치 못한 곳에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당하게 외치는 체키의 손에는 팔찌와 흡사하게 생긴 기계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것이 컨트롤러임을 단번에 알아본 제논은 그것을 받아 들고 세심하게 관찰해보았다. 누가 보아도 복잡한 기술로 섬세하게 만들어진 것 같은 컨트롤러를 이리저리 살피던 제논은 이내 그것을 자신의 팔에 장착하였다. 제논의 팔에서 반짝거리는 컨트롤러를 보며 뿌듯한 표정의 곰돌이 인형이 말했다.
“저와 베리타스의 박사님들이 함께 직접 만든 컨트롤러입니다. 성능을 향상하느라 조금 고생했습니다만 아무튼 잘 사용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감사합니다. 체키”
“뭐야! 네가 만든 게 아니라 묻어가기잖아!”
벨의 지적에 체키는 그 컨트롤러를 만드는데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으며, 엄청난 과학 기술을 쏟아 부었고, 수많은 재료가 사용되었는지에 관한 내용을 에드윈과 함께 줄줄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급작스럽게 쏟아지는 과학용어에 벨은 귀를 틀어막고 “아아~ 안 들린다!”라며 기지 내를 뛰어다니며 도망쳤다.
“벨, 우리도 선물 줘야지. 나랑 벨도 같이 준비했어.”
헨리테가 그런 벨을 부르며 선물을 어디에 뒀느냐고 묻자 벨은 망가지지 않도록 다른 곳에 두었다면서 기지 내에 있는 자신의 숙소로 순식간에 들어갔다. 이내 등 뒤에 무언가 숨긴 채 미소를 만면에 가득 피우며 나오는 벨. 곧장 제논의 앞으로 다가온 벨은 방긋 웃으면서 제논에게 등 뒤에 숨겨두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제논! 나랑 결혼하자! 재규어를 타고 신혼여행을 가자!”
갑작스러운 벨의 고백에 파티장에 있던 모든 이들이 사례에 걸려 쿨럭거렸다. 몇몇은 놀란 눈으로 감탄사를 내뱉거나 멋있다고 중얼거리며 뺨에 작은 홍조를 띄우고 있었다. 그들 중에서 특히나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헨리테였다. 굳어버린 헨리테의 앞에서 당당하게 꽃을 내밀고 있는 벨과 그 꽃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제논은 살며시 그 꽃을 받아들면서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행은 프로멧사가 더 신속하다고 생각합니다.”
“와! 받아주는 거야? 그리고 프로멧사는 경치 구경하는 재미가 없잖아! 긴장감도 없고!”
“그렇군요. 기억해 두겠습니다.”
“안 돼!! 이 청혼은 무효야!”
무언가 분위기 좋게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에 불안감을 느끼며 둘 사이에 끼어들어 갈라놓는 헨리테의 모습에 벨은 폭소를 터트리면서 농담도 구별 못 하는 바보라고 그를 놀렸다, 막상 청혼을 받은 장본인인 제논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자신이 받은 꽃다발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달리아는 아니네요.”
예전에 그가 벨에게 선물해 주었던 달리아와는 달리 꽃대에 작은 종 모양의 꽃망울들이 조롱조롱 매달려 있는 독특한 모양의 꽃으로 만든 꽃다발. 꽃다발에서 피어오르는 향긋한 꽃향기가 얼굴을 가득히 감싸오자 제논은 조용히 눈을 감고 그 향기를 들이마셨다. 그런 제논의 모습에 미소를 지은 헨리테가 약간 헛기침을 하여 제논의 시선을 끌고는 말했다.
“리프레 인근에서 가져온 사루비아라는 꽃이야. 꽃말은 ‘가족애’이지.”
“널 가족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뜻으로 가져온 거야!”
“감사합니다. 벨. 헨리테.”
헨리테의 말에 끼어든 벨이 케이크를 가리키며 이것도 자신들이 구해온 것이라고 말했다. 제논은 싱그럽게 피어있는 꽃다발을 바라보며 그들에게도 역시 고개를 조금 숙이며 감사 인사를 하였다. 그에 벨은 방긋 웃으면서 그럼 다음 자신의 생일에 기대하고 있겠다고 말했고, 헨리테는 품에서 다시 사루비아 한 송이를 꺼내었다.
“음? 헨리테 너도 따로 주려고?”
“아니, 제논의 선물도 좋지만 나는 벨이랑 이 꽃을 나누는 사이가 되고 싶은데?”
헨리테가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벨의 귓가에 사루비아 꽃송이를 끼워주었다. 그것을 보고 있던 모든 요원이 그의 행동에 감탄사를 내뱉었는데 이것은 절대로 그가 로맨틱한 대사를 해서가 아니라 그의 결말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나도 너한테 줄 달콤한 선물이 있는데.”
방긋 웃으면서 헨리테의 얼굴에 주먹을 휘두르는 벨. 정확하게 헨리테의 얼굴 정중앙에 꽂힌 벨의 주먹은 엄청난 크리티컬을 터트리면서 헨리테를 허공으로 솟구치게 하였다. 가공할 만한 힘에 붕 떠오른 헨리테는 포물선을 그리며 지하기지 맞은편으로 날아가 버렸고, 그런 그들의 행동이 이제는 익숙한 일렉스는 태연하게 자신의 선물을 들고 왔다.
“자, 그럼 다음은 내 선물인가? 어서 풀어보라고!”
일렉스가 앞으로 나와 자신의 선물상자를 제논의 품에 안겨주었다. 곱게 포장된 선물의 포장지를 뜯어내자 안에서 보드라운 촉감을 가진 파란 목도리가 흘러나왔다. 제논의 눈과 비슷한 푸른색의 목도리는 한 올 한 올 꼼꼼하게 짜여 있었다. 제논이 목도리를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펼쳐 들자 다른 사람들도 그 목도리를 보면서 예쁘다고 말해주었다. 그 칭찬에 일렉스는 머쓱하게 웃으면서도 조금은 뿌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직접 짠 목도리야. 조금만 시간이 더 있었으면 곰돌이든 루티든 만들어 줬을 텐데 아쉽네. 아무튼, 요즘 더 추워졌으니까 따뜻하게 입고 다니라고!”
“일렉스가 직접...”
우락부락하고 커다란 덩치를 가진 일렉스가 여인들처럼 섬세하게 목도리를 짜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았던 제논은 메모리에 과부하가 걸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생각을 중단하였다. 이내 목도리를 해보라는 다른 레지스탕스 요원들과 벨의 청원에 제논은 푸른 목도리를 목에 둘러보았다.
“와! 제논 귀엽다!”
“음, 길이도 적당하네. 마음에 들어?”
“감사합니다. 일렉스.”
제논이 역시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하였고, 일렉스는 그런 제논의 머리를 커다란 손으로 거칠지만 상냥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일렉스가 옆으로 피하자 지그문트가 주먹정도 되는 크기의 작은 상자 하나를 들고 다가왔다. 그녀가 제논의 두 손에 그 상자를 살며시 내려놓았고, 풀어보라는 듯이 살짝 웃어 보이자 제논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내 상자의 포장을 풀었다. 리본을 풀고 상자의 뚜껑을 열자 그 안에는 작게 반짝거리는 펜던트가 있었다.
펜던트를 들어 올리자 짤랑 소리를 내며 가느다란 목걸이 줄이 같이 달려 나왔다. 손바닥에 쏙 들어오는 작은 펜던트의 옆에는 더 작은 버튼 하나가 튀어나와 있었다. 제논이 그 버튼을 누르자 달칵거리는 작은 소리와 함께 펜던트의 뚜껑이 열렸다. 그러나 사진이 들어 있어야 하는 작은 공간은 텅 빈 하얀 공백으로 채워져 있었다.
“넣을만한 사진을 찾아봤는데 제논이랑 같이 찍은 사진은 없더라고요.”
지그문트의 말에 제논은 다시 펜던트를 닫으며 괜찮다고 말하려는 순간 벨이 커다란 사진기를 손에 들고 나타나며 소리쳤다.
“그래서! 이번에 다 같이 찍기로 했어! 자자, 빨리들 모이라고!”
벨이 빠르게 손을 휘저으며 다른 사람들을 불러 모으자 모두가 제논의 옆으로 모여들면서 옹기종기 자리를 잡았다.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헨리테와 제논의 옷매무새를 다듬어주는 일렉스. 그리고 곰돌이 탈을 다듬는 체키에게 그걸 쓸 거면 사진은 왜 찍는 것이냐고 묻는 데몬. 에이든이 사진기를 고정하고는 손짓을 해가며 그들의 자리를 배열해주었다. 이내 완벽한 앵글이 만들어지자 에이든이 오케이 사인을 보내며 타이머를 누르고 자신도 재빨리 그들의 옆으로 달려갔다.
“?!”
순간 느껴진 펄스에 어색하게 자세를 잡던 제논의 고개가 돌려졌다. 갑자기 고개를 돌린 사진의 주인공 덕분에 사진을 망쳤다며 장난스레 떠드는 다른 레지스탕스와는 달리 제논은 굳은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굳어버린 제논의 표정에 지그문트가 걱정하며 제논에게 무슨 일이냐며 말을 걸려는 순간, 다시 느껴진 강렬한 펄스에 제논은 그녀의 손길이 닿기도 전에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느껴지는 그리운 펄스에 제논의 머릿속은 온통 그것을 쫓아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나, 혹은 부스터를 쓰면 더욱 빠르게 갈 수 있다는 판단 따위는 이미 생각할 틈도 없이 그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도록 달리고 또 달렸다. 달리는 그의 뒤로 하얀 입김과 푸른 목도리가 흩날렸다. 손에는 아까 지그문트가 준 펜던트를 꼭 쥔 채로, 그는 점점 약해져 가는 펄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얼어붙은 땅을 박차고 달렸다.
거센 숨소리에 하얀 입김이 그에 맞춰 그의 주변에 감돌았다. 숨을 한번 내쉴 때마다 나오는 입김은 순식간에 차가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펄스가 마지막으로 느껴지던 곳까지 쉬지 않고 달려온 제논은 가빠오는 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에델슈타인 인근 공원. 베릴이 처음으로 자신을 쫓아왔던 바로 그곳에서 베릴의 펄스는 더는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이제는 느껴지지 않는 그녀의 펄스에 제논은 간절한 마음을 담아 계속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더는 펄스도, 그녀의 모습도 볼 수 없는 텅 빈 공원의 모습만이 눈에 담겼다.
“...베릴...”
마지막 전투 이후로 직접 꺼내어 불러본 적이 없었던 이름을 나직이 꺼내자 차가운 허공에 그 이름 또한 하얀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그런 숨결을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제논은 이제 더는 그녀의 펄스가 느껴지지 않음에도 그곳을 쉬이 떠나지 못하고 가만히 서서 하얀 숨결을 내쉬고 있었다. 차가운 공기가 폐 안에 가득히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다시 그녀를 찾으려는 듯이 공원의 주변을 살피던 제논의 시야에 무언가 반짝거리는 것이 들어왔다.
메마른 화단에 이질적으로 꽂힌 물체. 차갑게 얼어붙은 화단에 꽂힌 그 물체에 제논은 이끌리듯 그것을 향해 다가갔다. 조금 다가가 살펴보니 그것은 마치 꽃처럼 기다란 꽃줄기와 둥그런 꽃잎을 가지고 있었다. 손을 뻗어 그것을 뽑아든 순간 느껴지는 싸늘한 한기에 그것이 철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철로 만들어진 꽃. 마주하고 있는 두 개의 작은 꽃잎 바깥에 다시 마주하고 있는 커다란 두 개의 꽃잎이 어우러지는 꽃 모양을 살펴보던 제논은 이내 자신을 부르는 다른 이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제논!”
자신을 보자 다급히 이름을 부르며 다가온 지그문트는 그를 자세히 살펴보면서 걱정 어린 목소리로 괜찮으냐고 물었다. 왜 밖으로 나간 것인지 물어보던 지그문트는 그가 양손으로 소중히 움켜쥐고 있는 조금 서툴게 만들어진 고철 꽃을 보고는 아무 말이 없이 조용히 흐트러진 그의 목도리를 다시 부드러운 손길로 여며주었다.
“돌아가요. 다들 기다리고 있어요.”
지그문트의 말에 고철 꽃을 바라보고 있던 제논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와 함께 다시 지하기지로 돌아왔다. 갑자기 주인공이 뛰쳐나가면 어떻게 하느냐며 장난기 어리게 말하는 벨과 정말 놀랐다고 말하는 일렉스. 이내 헨리테가 왜 나간 것인지 물으려 하는 순간 제논의 뒤에 있던 지그문트가 헨리테와 눈을 마주하면서 조용히 손가락을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묻지 말라는 그녀의 손짓을 본 모든 이들은 전부 아까부터 손에 쥐고 있던 고철 꽃만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는 제논을 바라보았다.
“루티, 이 꽃은 무슨 꽃이야?”
한참 꽃을 바라보던 제논이 그 고철 꽃을 루티에게 보여주며 묻자 루티는 기계 부품으로 조립된 고철 꽃을 이리저리 살펴보고는 대답해 주었다.
“모양으로 유추하자면 양귀비꽃인 것 같은데.”
“양귀비라... 망각이라는 꽃말을 가진 꽃이네요.”
양귀비라는 말에 지그문트가 약간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해주었다. 하얀색과 붉은색이 뒤엉켜 칠해져 있는 고철 꽃의 색깔을 보며 말하던 지그문트의 말에 반박하듯이 벨이 붉은 부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냐, 붉은색은 위로라고 알고 있는데?”
그들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제논은 말없이 그 꽃을 얼굴에 가까이 가져갔다. 향이 날 리 없는 가짜 꽃의 향을 맡으려는 듯 눈을 감고 그 꽃 사이에 코를 묻은 제논은 조용히 그 사이에 감도는 향을 느꼈다. 서늘한 쇠의 향 사이로 그녀다운 차갑고 곧은 향이 나는 것 같았다. 죽지 않아서 다행이야. 살아 있어줘서 고마워. 꽃의 향을 맡던 제논의 볼에 한줄기 작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온 눈물에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동료들이 더욱 놀라며 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소란스럽게 유난을 떨며 자신의 눈물을 닦아주는 동료들의 모습에 제논은 그런 그들의 모습을 눈을 동그랗게 뜨곤 말똥말똥 바라볼 뿐이었다. 어느새 눈물을 그치고 자신들을 바라보는 제논의 모습에 벨이 그의 이마를 맵게 딱! 소리가 나도록 때렸다.
“울면 사진 찍을 때 완전 못나게 나온다고?”
“제논이라면 울든 화내든 찡그리든 너보다는 젊게 나올 거야.”
헨리테의 능글맞은 위로에 농담 같은 진담을 던지는 벨. 그건 너무하잖아! 라고 소리치는 헨리테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벨은 제논의 눈가에 맺혀 있는 눈물을 소매로 닦아주었다. 갑자기 이마를 맞은 것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벨을 바라보고 있던 제논은 눈물을 닦아주는 거칠고 서툴렀지만 다정함이 묻어있는 손길에 제논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자! 다시 사진 찍자고! 남는 건 사진뿐이니까!”
벨이 활기차게 말하면서 다시 다른 아이들을 불러 모았고, 다시 제논을 중심으로 모인 레지스탕스들은 저마다의 표정과 자세를 취하였다. 중심에 서 있던 제논의 머리 위에는 고깔모자가 아닌 루티가 올라왔고, 친구들이 중심에서 거친 기계 부품으로 만들어진 고철 꽃을 소중히 품에 안은 채 사진기의 렌즈를 바라보았다.
“하나, 둘...!”
타이머의 숫자를 입으로 외치던 벨의 신호에 맞춰 모든 동료가 동시에 소리쳤다. 그 찰나의 순간, 아직 꽃을 보며 살짝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제논에게 지그문트가 그의 볼을 살짝 찌르며 속삭였다.
‘웃어요, 제논! 우리가 있잖아요.’
그의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장난스럽게 말하는 지그문트. 그런 그녀의 행동에 제논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따라 미소를 지었다. 서로를 향해 다정한 미소를 짓는 두 사람. 그런 두 사람의 주변에는 믿을 수 있는, 앞으로도 계속 함께할 동료들이 그런 두 사람과 함께 웃고 있었다. 그래, 나는 이제 혼자가 아니구나.
“생일 축하해 제논!”
많은 동료 사이에서 제논은 작은 기계 꽃을 꼭 껴안고 환히 웃었다. 각자 저마다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동료들과 그런 그들 사이에 있는 자신. 처음으로 자신이 찍힌 사진을 받아 든 제논은 소중하게 그것을 품에 안았다. 혹시 또다시 자신이 기억을 잃는다 해도, 이 사진은 그대로 남아 추억을 회상하게 도와줄 것이다. 사진에 찍힌 동료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잊지 않으려는 듯 바라보던 제논의 시선이 자신 속 자신의 품에 안겨있는 기계 꽃을 바라보았다. 펜던트와 함께 반짝이는 기계 꽃.
‘다음엔, 너도 같이 있으면 좋겠다.’
수많은 기계 부품들이 버려져 있는 기계 무덤의 부품 더미 위에 앉아있는 하나의 인영. 하얀 달빛 아래에서 은청색을 발하고 있는 긴 머리카락이 쌀쌀한 겨울바람에 흔들렸다. 두 뺨에 있는 푸른 네온 빛의 제네로이드 마크가 어둠 속에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와 같은 색의 눈동자는 하늘에 걸려있는 하얀 달과 작게 반짝거리는 별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마을의 불빛들을 바라보며 작게 속삭였다.
“생일 축하해.”
제논 = 청년, 제복, 평상복.
나는 죽어가고 있었다. 겔리메르가 만든 가스는 흡입 후에 겨우 깨어난다 해도 모든 것을 잊게 하여 버릴 것이고 그것은 나에게는 곧 죽음과도 같았다. 지난 2년간 다시 쌓았던 내 마음속 소중한 모든 것들을 잃게 된다면, 그것이 죽음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죽음이란 말인가.
이 멍청아! 힘줘서 걸으라구…! 웅웅거리는 귓가로 앙칼진 목소리가 꿈결처럼 다가와 흐르다가 귓바퀴를 타고 떨어졌다. 오르카구나. 오르카가 날 부축하고 있었지…. 내 뼈대를 구성하는 소재들은 겔리메르가 하이-테크놀로지라고 자부했던 만큼 완벽한 몸체를 이루고도 그 무게가 보통의 성인 남성과 비슷했으나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이 소녀에게는 그것 또한 버거울 것이 뻔했다. 게다가 나는 지금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고장 난 인형처럼 축축 늘어져 있었다. 뇌의 활동이 서서히 정지되어간다. 중추가 마비됨에 따라 모든 시스템 또한 따라서 그 활동을 멈춰간다. 정보를 해석해내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끝났구나, 하고 내 유언이나 다름없을 기억들을 임시처리장치 쪽으로 복사해 넣으려던 찰나에 나는 오르카가 나를 놓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많은 외침, 울음소리, 어린 여제의 목소리. 그리고 알 수 없는 환한 빛. 어느 순간 나를 덮쳐 온 빛 속에서 나는 전혀 고통스럽지 않았고 몸이 무겁지도 않았다. 그리고 어떤 여자를 보았다. 내 생각에는, 내 생각에…그녀는 틀림없는,
메이플 월드의 정신이다.
땡-땡-…마을 밖 건널목에서 기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광산으로부터 루를 잔뜩 싣고 나오는 열차일 것이다. 마을에는 아이들이 잔뜩 뛰어다녔다. 블랙윙의 제복을 입은 사람들도 없었다. 그럼에도 내가 이처럼 긴장하고 있는 이유는 이곳이 정신없이 지내다가, 문득 마을 가운데에서 제정신을 찾은 것으로 합리화시키기에는 무언가가 오래되었다는 것이고 멀리 보이는 벤치에 사진 속에서 봤던 어릴 적의 내가 앉아있었기 때문이었다. 메소레인저의 가면을 쓴 어린아이가 내게 부딪히며 지나간 순간에 나는 내가 정말로 두 발을 딛고 이곳에 서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꿈이라기엔 너무나도 생생했다.
" 형아도 혼자예요? "
어린 나는 용케도 소리 없이 다가간 나를 알아보고 말을 걸어왔다. 아직은 모든 게 연한 아이였다. 눈빛도, 그 색도, 미소도. 연한 눈으로 연하게 웃고 있었다. 루티가 봤으면 어린아이 주제에 세상을 다 산 눈을 하고 있다고 잔소리를 할지도 몰랐다.
" 혼자가 아니지만 혼자 있어. "
" 그게 무슨 뜻이에요? "
" 일행과 떨어져 있다는 뜻이야. "
" 음…나도 그래요. "
요즘 마을에서는 메소레인저 놀이가 유행이라고 했다. 악역을 해 줄 사람이 없어서 다 같이 수아르 아저씨에게 부탁하러 가는 바람에 잠시 혼자 남았어요. 작은 입에서 오물오물 중얼거리는 설명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악역은 내가 하면 되는데…앞으로도 시켜주지는 않을 것 같지만. "
도와줄 사람이 있다면 전부 다 떠맡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괜찮아. 나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었다. 아이는 말간 눈으로 왜요? 하고 물었다. 나는 신중하게 답을 골랐다. 아이가 나와 같은 깨달음을 얻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 …분명 그걸 더 기뻐해 줄 테니까. "
그렇지만 결국 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것이었고, 그래서 너무 간결해졌으며 너무 뻔한 대답이 되었다. 다수를 한 번에 긍정적으로 납득하게 만드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구나. 도서관에서 봤던 수많은 현자가 대단해졌다. 그래도 다행히 너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 사실은 얼마 뒤가 제 생일이에요. "
" 생일? "
" 응. 지그문트가 검집을 만들어 준다고 해서 내 단검을 빌려줬어요. 그 애는 못하는 게 없으니까 분명 아주 멋진 검집을 줄 텐데 어떻게 생겼을까요? "
나는 갑자기 찾아든 당황스러움에 아주 멋질 거야, 라는 대답을 급하게 남겼다. 어떻게 생겼는지는 나도 상상해야만 하는 사항이었다. 받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고 나는 어린 내가 이른 시일 내로 죽음과도 같은 일을 맞이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겔리메르에게 납치당한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잊게 될 것이다. 곧.
" …생일파티, 하자. 오늘 하지 않을래? 나도 도와줄게. "
내가 왜 갑자기 과거로 오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메이플 월드의 정신이 바란 일이라고 어렴풋이 아는 게 전부였다. 내가 살던 마을로 왔고 나를 만났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생겼어. 그러니까 해야 해. 내가 어릴 적 생일파티를 했었는지 현재의 나는 기억조차 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해주고 싶었다. 언젠가 기억을 찾게 되면 지금 이 순간이 있는지, 그때 확인하면 될 테니까.
" 형아? "
작은 손이 등을 토닥인다. 감았던 눈을 뜨고 어린 나의 어깨너머로 바라본 아이들은 고깔을 쓰고 얼굴에 크림을 잔뜩 묻힌 채로 불안한 표정이었다. 웃어 보이자 금세 환한 웃음으로 얼굴을 바꾸는 것이 정말 어린 아이들다웠으나 그 와중에도 너만은 침착한 표정이었다. 나는 껴안았던 너를 놔주고 그대로 눈을 맞추었다. 생기가 도는 눈이다. 뺨은 말랑말랑했다. 피부 아래로는 피가 흘렀고 그 중심에서는 심장이 뛰고 있었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자라고, 늙어서, 죽게 되겠지. 남들과 같이. 내가 누구인지 고민해야 할 일도 없을 것이고 분명하지 않은 과거에 불안해할 일도 없을 테지만 이미 이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일 뿐이다. 그렇다면 나는 말을 해주기로 했다. 전부 다 잃어버려도 마음속 깊은 속에서 살아남아 버팀목이 되어 줄 그런 말들을. 내가 듣고 싶었던 그런 말들. 내가 행복했던 그런 말들. 소중한 것. 지키고 싶은 것. 생각해야 하는 것.
" 아주 소중한 친구들을 만나게 될 거야. "
" 그중에 토끼를 닮은 제네로이드의 이름은 루티니까 기억해 둬. "
" 모든 걸 잃어버렸고 잃은 게 더 커 보이지만, 아니. "
" 더 소중하고 중요한 것들도 알게 될 거야. 또 누군가는 너를 좋아한다고 해줄 테지. "
" 더 많은 친구가 생기고 동료도 늘어나고. 사람들이 너를 볼 때의 눈빛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잘 봐. 너는 항상 죽고 싶었어. 하지만 난 이제 지키기 위해 제일 오래 살고 싶어. "
" 행복해질 거야. 생일 축하한다. 이다음 파티는 꽤 나중이 될 테니까. "
지금 잔뜩 놀아두는 게 좋아.
" …갑자기 없어졌다…. "
" 마지막에 뭔가 이상한 사람이었어. 그렇지 제논? 그래도 도와줘서 되게 신 났다! "
" 날아다닐 때 선생님이 제일 당황한 표정이었지? "
아이들은 마치 환상처럼 흔적도 없이 저들 눈앞에서 사라진 남자의 진위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지 않았다. 그는 물론 진짜였다. 그렇지만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만 했던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넘길 뿐이었다. 제논은 조용히 서 있었다. 가까이서 바라봤던 그 얼굴만을 생각했다. 그리고는 여느 때와 같이 옅게 웃었다. 아무도 제논이 잠깐 입을 열지 않았던 짧은 순간에 대해서는 자각하지 못했다. 그렇게 잔뜩 이야기를 해주면 나도 기대하게 되어버리니까…비록 마냥 행복하지는 않은 시간이라 해도, 겪어야만 하는 것들이라면.
" ……다시 아까 그 빛 속이네. "
" 그래요. 내가 있는 곳이죠. "
" 그건 꿈인가요? "
" 글쎄요? "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상대도 똑같은 행동으로 마주해왔다. 알 수 없는 눈빛을 더해서. 메이플 월드의 수많은 모험가를 위해 힘을 빌어주는 이 세계의 정신체, 여성의 모습을 한 그것에게서는 따뜻한 느낌이 났다. 무슨 의도입니까? 글쎄요. 당신이 날 선택한 건가요?
" …아니요. 내가 아니에요. 혼자가 아니에요. “
앞쪽에 짧은 공백이 있었다.
" …그럼 이제 보내줘요. "
" 그럴까요. "
…이번에야말로 정말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그 사이에 먼지라도 낀 것인지-좀 웃긴 표현이군- 온몸이 삐걱거렸다. 기침이 터져 나와 말도 하기 힘들었지만, 그 소리를 들은 듯 지그문트가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나는 놀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의도치않게 어색한 기류를 방안으로 끌고 들어오고 말았다.
" 어…음…괜찮아 보이는군요. 좀 더 감동적인 장면을 상상하고 있었는데 이럴 줄은 몰랐지만…눈물이 나오지 않게 되어버린 건 어쩔 수 없죠…. 생일이 지나기 전에 깨어나서 다행이에요. "
" 오늘이…내 생일이에요? "
" 네. 당신이 연구소에서 나온 날이에요. 모두가 혹시나 하면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서둘러요. "
방금 일어났는데…. 멀쩡한 거 다 알아요. 지그문트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재빨리 돌아나갔다. 귀가 새빨개져 있었다는 사실은 아마 모를 것이다.
그녀의 뜻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그 외에 궁금했던 것들도 오히려 더 알 수 없게 만들어 놓았지만 어쩐지 개운했으므로 다시 나타나 주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 같다. 나는 아주 멀쩡하게 일어나서 걷고 있었다. 죽기 직전의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것투성이. 문 박사님이나 프로메테 박사님, 에드윈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다. 알 수 없는 것, 명확하지 않은 것. 음, 오히려 탐구할 것이 생겼다는 것에 기뻐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기분 나쁘지 않았다. 모르는 것이 생기는 것은 인간의 삶은 의문투성이라는 말의 뒷받침이 되는 느낌이었다. 걱정하든, 걱정하지 않든 시간은 흐른다. 오늘 일에 따른 결과가 언젠가 나타날 것이고 또 의문이 생길 것이고 또 답을 찾아가겠지. 나는 항상 평범한 삶을 갈구해 왔다. 어쩌면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고. 비공정에서의 일들 또한…본인에게 있어서 실망할 것들 투성이지만 조금 미뤄야만 할 것 같다. 왜냐하면, 오늘은 내 생일이니까. 일렉스에게 케이크로 얼굴을 맞을지도 모른다. 나는 침대 헤드에 걸쳐져 있던 카디건에 팔을 꿰었다.
운명의 축이 틀어졌다.
봉인석을 품고 새로운 대적자가 탄생했다.
네가 상대할 자가 아니다.
“제논, ……아요?”
“……네?”
“괜…… 제논. …말, 들…….”
몇 번의 반응 검사 끝에 지그문트는 고개를 저으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그간 판테온을 도와가며 스펙터들을 처치하던 중, 그들의 이물질이 제논의 파츠 마다 스며든 듯 했다. 특히 얼굴과 목의 접합부, 녹슨 제너레이트 마크뿐만이 아니라 사운드 드라이버 쪽의 이상도 감지되어 수리 및 보완이 필요한 상태였다. 그의 상태를 듣고 여교관은 난처해졌다. 바디 파츠라면 체키 등을 불러 레지스탕스의 고유 기술력으로 갈아 끼워도 호환이 될 텐데 문제는 헤드 쪽이었다. 바디 파츠보다 뇌와 같이 복잡한 회로로 미세하게 작동하는 쪽이기에 섣불리 손을 댈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다른 레지스탕스 일원들도 어깨를 으쓱거리며 최선을 다해보겠다는 소리뿐, 확언은 나오지 않는 실정이었다.
“지그, 난… 상관…… 괜, 아요.”
“제논. 좋은 수가 없을까요?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라곤 겔리메르가 연구를 진행했던 그 곳으로 다시 돌아가 자료를 찾는 수밖에 없는데…….”
“거기에 파…… 있.”
“네? 자세히 말해 봐요, 제논. 여기 펜을 줄게요.”
제논은 어릿거리는 기억의 자락을 움켜쥐고, 연구실 내부를 대강 그려내었다. 겔리메르의 실험실 내부에 있는 서랍 쪽으로 안드로이드의 헤드 파츠들이 있음을 알아내어 그 즉시, 벨과 헨리테가 공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하고야 말았으니.
“이건…….”
블랙윙의 스우와 매우 흡사한 파츠에 일동은 침묵에 휩싸였다. 겔리메르가 어떤 야망으로, 어떤 목적으로 만들었는지 알 길이 없었으나 너무나도 닮은 외형에 그 누구하나 한번 교체해보자는 소리조차 꺼내질 못하고 있었다. 그들의 침묵에 의아해하던 제논이 먼저 침묵을 깨지 않았더라면 아마 제논의 에너지가 방전될 때까지 나서는 이가 없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께름칙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달리 방도가 없음을 깨닫고, 지그문트는 체키에게 ‘스우’를 넘겼다. 받아든 체키 또한 곰 탈 너머로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으나 막상 교체를 해보니 완벽하게 상호 호환하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완벽하다 할 수 있어. 이걸 무슨 목적으로 만들었을 진 몰라도 내 생각엔, 언젠가 블랙윙의 오르카와 스우를 없애고서 제논과 옆에 있던 안드로이드에게 각각 스우와 오르카 파츠로 교체하여 블랙윙 전체를 조종할 셈이었는지도 몰라. 뭐, 어디까지나 내 추측이지만.”
체키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마치 퍼즐조각처럼 착착 들어맞는 걸 보며 기괴함까지 느껴졌을 정도여서 서둘러 반응 검사와 적합성까지 검사하고는 신이 난 상태로, 제논의 헤드 파츠를 옆구리에 끼고 연구실로 사라졌다. 지그문트는 여전히 좋지 못한 안색이었지만 본래의 제논과 다를 바가 없었으므로 말을 따로 덧붙이진 않았다.
“제논. 우리가 최선을 다해 제논의 헤드를 꼭 고쳐놓을게요. 만약 불편한 게 있다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알겠죠?”
“네. 지그문트.”
딱히 불편하거나 이물감이 있는 건 아니라서 제논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알아들었고 괜찮음을 표현해야 지그문트가 안심할 것 같아 행한 행위였다. 고작 파츠 하나 갈아 끼운다고 제논의 전체가 흔들릴 만한 사안은 존재하지 않았다. 평소와도 같은 하루를 보냈고, 적을 섬멸하고 아군을 돕는 데엔 하등 문제되지 않았다. 그저 파츠만 달라진 것뿐이었다.
이렇게 생각했었건만.
“너, 너! 너…… 누구야? 스우야?”
레지스탕스 비밀기지 지하에 자리한 곳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오르카를 보기 전까지는.
“저는…….”
“스우? 스우야? 스우 맞지? 오르카를 찾아온 거야? 스우!”
“저기, 저는요.”
“아냐! 제발, 제발 스우여야만 해……. 스우, 스우만이…….”
“…….”
제논은 오르카의 절규를 묵묵히 들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스우가 아닌, 제논이라고 분명히 밝히는 쪽이 오르카를 위해서라도 더 좋은 방향일 텐데 어째선지 제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꼭, 스우라고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창백한 얼굴로 식은땀을 흘리며 중얼거리는 그녀에게 제논은 결국 다시 찾아오겠노라고, 그리 말하고 그 곳을 벗어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 후로 제논이 슬쩍 찾아갈 때마다 오르카는 아픈 몸을 일으켜 앉아 밝게 웃으며 맞이했다. 스우가 오지 않아 하루 종일 심심했다고 말하며 볼을 부풀리거나, 자신은 움직일 수 없으니 가까이 와달라는 부탁과, 몸이 자유로워지면 다시 뛰놀자는 등, 주로 얘기를 하는 쪽은 오르카였고 그것을 듣은 쪽은 제논이었다. 다른 이 같았다면 오르카에게 동조하며 얘기를 하거나 듣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일 텐데, 제논은 마치 오르카를 대하던 스우처럼 묵묵히 오르카의 얘기를 들어주었다. 간간히 듣고 있다는 반응과 함께 곧은 시선으로 오르카를 보는 눈은 적어도 진실된 것이었다.
“오르카는 여기가 따분해! 스우, 날 여기서 꺼내줘.”
“……그건 안 됩니다. 지그문트가 안된다고 했어요.”
“어째서? 스우는 그 여자의 편인 거야? 오르카의 편이 아니고?”
“…….”
제논이 난감해 하자, 오르카는 샐쭉하게 입술을 내밀곤 우는 소리를 냈다. 이러면 제논이 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는데 그것이 퍽 재밌는 모양이었다. 제논은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대신 오르카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오르카는 잠시 당황하는 듯 하더니 이내 익숙하게 사르르 눈을 감았다. 자신은 분명 스우도, 스우를 대체할 만한 그 무엇도 아니란 걸 알고 있었지만 오르카를 만날 때마다 드는 생각은 이 사람은 외로운 거구나. 할 수 있는 거라곤 차가운 기계의 손으로 오르카를 대하는 것밖에 없는데도 이 사람은 이것으로도 행복해하는 구나. 그런 것들이었다.
“앞으로, 앞으로도 오르카 곁에 있어 줄 거지? 응? 약속해!”
새끼손가락을 내미는 오르카의 앞에서 제논은 잠시 망설이다가 손 모양을 똑같이 하고 손가락을 걸었다. 부질없는 약속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보일지는 몰라도 이 순간만큼은 오르카도, 제논도 단순한 장난처럼 여기지 않았다. 어째선지 약속을 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제논에게 다가왔다.
“우리는, 블랙헤븐에 대항할 것입니다.”
공식적인 표방을 통해 그 자리에 모인 역대 영웅들과 모험가들, 연합원들이 뜻을 함께했다. 긴장감이 감도는 현장에서 그들은 결연한 표정으로 저마다 블랙헤븐으로 향했다. 제논은 파츠가 채 정비되지 않아 잠시 보류인 상태였다. 전시상황은 계속해서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중, 드디어 제논의 헤드 파츠의 수리가 완료되었음을 알리는 소리에 제논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모두를 도와 겔리메르를 저지하는 데 도움을 주고 싶었다. 한걸음에 달려가는 찰나, 오르카의 방 쪽에서 타인의 목소리가 들려와 제논은 우뚝 멈춰 섰다. 벌려진 문 틈 사이로 보이는 두 인영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블랙윙은 오르카 거야! 스우도 되찾고, 블랙윙도 원래대로 되돌려놓을 거야.”
“네, 오르카님!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파란 로브를 뒤집어 쓴 낯선 이가 방 밖으로 나오려 하기에 제논은 급히 몸을 숨겨야 했다. 인기척이 사라지고, 제논은 방에 들어서고자 문고리를 쥐었다.
“……거짓말이야.”
차분하기보다도 다소 힘이 실려 있지 않은 오르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블랙헤븐에 올라가고 나면, 아마도 그것이 오르카의 마지막일 테니까.”
“……오르카?”
“너는…….”
“오르카, 그게 무슨 소리죠? 블랙헤븐에 가겠다는 건가요? 그 몸으로?”
“못 본 척 해줘. 제논.”
“!”
제논의 기억상으로, 오르카는 단 한 번도 자신을 제논이라 부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이 감정은 필시 놀람이었다.
“다시, 다시 돌아올 수 없어. 오르카는 블랙헤븐을 끝으로 스우와 함께 마지막이 될 테니까. 그래도…… 그래도 오르카와 제논은 약속을 했잖아?”
‘앞으로, 앞으로도 오르카 곁에 있어 줄 거지? 응? 약속해!’
“오르카. 저도 오르카에게 약속 하나 해도 될까요?”
“……말해봐.”
“1월 3일 날. 꼭 그 때 절 보러 와주세요.”
“…….”
오르카는 제논의 앞에서 새끼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제논은 그 때처럼 손가락을 걸고서 자신을 지나쳐 떠나는 오르카를 망연히 바라봤다. 그 떠나가는 뒷모습은, 여전히 외로운 사람이었다.
블랙헤븐의 결과는 연합의 승리였다. 메이플 월드는 다시 일시적인 평화를 되찾았고, 중간에 많은 일들이 있었으나 이번 승리는 연합으로써 이루어낸 값진 결과물이었다. 제논은 기뻐하는 레지스탕스 일원들을 보며 미소와 엇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제논이 지을 수 있는 가장 밝은 얼굴이었다.
1월 3일.
레지스탕스뿐만이 아니라 에델슈타인 주민들까지 모두 제논을 축하해주었다. 이 날은 제논이 생성된 날이 아닌, 제논이 겔리메르에게서 벗어나 독립적인 감정으로 홀로서기를 한 날이었다. 그것을 모두는 제논의 생일이라 하였다. 생일은 좋은 거야. 아주 기쁜 날이지. 너를 만날 수 있어 고마운 날인 거야. 지그문트는 그리 말하며 선물상자를 건넸다.
“모두들 고마워요. 절, 받아줘서 고마워요.”
제논은 모두가 안겨다 준 선물상자 더미에서 작게 읊조렸다.
1월 3일.
‘오르카…… 와 줄 거죠?’
제논은 조용히 사념을 읊조렸다. ……오르카는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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